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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여성 레지스탕스의 이름을 각주에서 본문으로 올려놓기 위해 [책과 세상]

입력
2023.06.16 04:30
수정
2023.06.16 11:38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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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게토의 저항자들'

편집자주

책, 소설, 영화, 드라마, 가요, 연극, 미술 등 문화 속에서 드러나는 젠더 이슈를 문화부 기자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봅니다.


1944년 부다페스트에서 찍은 유대인 청소년 운동 단체 '프리덤'의 조직원들. 아랫줄의 가장 오른쪽이 프리덤의 카샤리옷(연락책)으로 활동했던 레니아 쿠키엘카다. 출판사 제공

'홀로코스트(주로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라는 거대 서사 안에서 난생처음 듣는 유대인 여성들의 이름이 생명력을 얻어 팔딱팔딱 튀어 오른다. 띠지에 적힌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화 결정'이라는 홍보 문구가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페이지마다 압도적인 장면들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영화처럼 다가온다.

폴란드의 유대인 여성 레지스탕스 투쟁기를 밀도 있게 기록한 논픽션 '게토의 저항자들' 이야기다. 그간 대학살의 가련한 피해자로 규정되며 '유순하고 수동적인 양'으로 여겨지던 유대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분리구역인 게토 바깥세상을 넘나들며 무장투쟁과 첩보활동을 벌이고, 시설을 폭파하는가 하면 사보타주를 실행하는 등 처절하고도 드라마틱하게 저항한 이야기가 생동감 있게 펼쳐진다.

이 한 권의 책을 간단히 요약하는 건 가능하지 않다. 막대한(740쪽) 분량 때문만은 아니다. 홀로코스트라는 중심 사건을 둘러싸고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인물들의, 수십 년에 걸친 이야기가, 유럽대륙의 여러 도시와 게토의 경계 그리고 국경을 넘나들며 펼쳐지기 때문이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1940년대 본격적으로 유대인 학살이 시작되자, 10~20대 젊은 유대인 여성 저항자들이 유대인 청소년 운동을 이끌고, 국경을 넘나들며 정보전을 벌이며, 수류탄을 생리대와 속옷에 숨겨 게토에 들여온다. 여성 유대인들은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후에도 지하 저항 운동을 조직해 봉기를 일으켜 대탈출을 시도한다. 폭발물을 수색이 어려운 가슴 사이에 끼워 밀반입하고, 나치에 저항하기 위해 노동수용소에서 제품을 만들면서도 일부러 품질을 저하시키는 방식으로 애면글면 저항한 기록을 읽고 있노라면 인간의 역사가 그 어떤 픽션보다 극적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책은 유대인 여성들의 10여 년간 대나치 투쟁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끝끝내 살아남은 레지스탕스들이 전후 신생 국가 이스라엘에서 겪은 고난과 좌절, 정치적 암투까지 엮어내며 홀로코스트의 비극이 현재진행형임을 암시한다.

1944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의 레니아 쿠키엘카. 출판사 제공

가히 '대서사시'라 일컬을 만한 책의 시작은 1924년 10월, 폴란드 옝제유프에서 태어난 유대계 여성 레니아 쿠키엘카의 탄생부터다. 안네 프랑크, 발터 벤야민 등 나치 독일에 의해 목숨을 잃거나 망명, 저항해 잘 알려진 유대인의 이름과는 거리가 있다. 레니아는 나치 침공 전 폴란드 영토인 벵진 지역의 유대인 청소년 운동인 '프리덤'의 카샤리옷(연락책)으로 활동하며 위장 작전을 수행했다. 게토 사이를 오가며 세미나를 주도하고 출판물을 전달하며 식량과 의약품을 밀반입하는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책에 등장하는 지비아 루베트킨, 프룸카 프워트니카, 차이카 클링어... 처음 들어보는 유대인 여성들의 이름이지만, 이들은 모두 나치에 저항한 투사였다.

자신 역시 폴란드 유대인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의 후손이기도 한 하버드대 출신의 저자 주디 버탤리언은 2007년 우연히 이디시어로 쓰인 책 '게토의 여자들(1946)'을 접한다. 이내 폴란드 게토 내부에서 반나치 투쟁에 참가했던 수십 명의 여자들의 사연을 알게 됐고 충격에 빠진다. 수년 동안 유대인 학교에 다녔지만, 이런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려 12년 동안 히브리어, 이디시어, 영어, 폴란드어, 러시아어, 독일어 등으로 작성된 회고록과 증언을 모으고, 가족 인터뷰를 진행하며 흩어져 희미해진 기록을 역사의 반열에 올린다.

그런데 어찌 이 영웅적인 저항의 역사는 국제적으로도, 심지어 유대인 내부에서도 눈에 띄지 않게 되어버린 걸까. 외부 세계가 각자의 정치적 입장에 맞게 이 레지스탕스의 서사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전후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유럽 출신의 유대인이 나약하다는 이미지를 덧씌우기 위해 투쟁사를 지웠다. 생존자의 증언마저 일부 정치인이 자신들의 정치 어젠다를 개발하는 데 이용됐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피해자 지위'를 중요시하는 폴란드는 유대인 박해와 무관하다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방관자를 넘어 가해자인 경우가 많았다. 전쟁 중 빼앗긴 재산을 유대인이 되찾으러 오거나 복수할까 두려워해 전후 폴란드에는 반유대주의가 만연했다. 게다가 '여성'이라는 젠더 특성으로 이들의 활약은 '아름답고 젊은 여성이라 성공했다'는 식으로 폄하됐다.

책의 중심인물인 레니아의 회고록(한 개인이 홀로코스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겪고 글로 남긴 최초의 기록 중 하나로 꼽힌다)을 접한 저자는 이같이 말했다. "나는 그저 연구자들이 쓴 논문의 각주에서나 그녀의 이름을 발견했을 뿐이다. 나는 이제 이 책을 통해 놀라울 정도로 용감한 행적을 남긴 이 여성을 감싸고 있던 덮개를 벗겨냄으로써 그녀의 이름을 각주에서 본문으로 올려놓으려 한다."

1946년 키부츠 야구르에서 연설하는 지비아 루베트킨은 유대인 투쟁 조직 ZOB와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봉기에서 활동한 유대인 청소년 운동 단체 프리덤의 리더였다. 전쟁 내내 지비아는 투쟁하는 유대인 여성의 신화적 상징으로 여겨졌다. 출판사 제공


게토의 저항자들·주디 버탤리언 지음·책과함께 발행·736쪽·3만8,000원


이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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