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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비극' 문법 그만! 드라마에 필요한 건 '장애 자부심'과 '휠체어 PP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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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비극' 문법 그만! 드라마에 필요한 건 '장애 자부심'과 '휠체어 PPL'

입력
2024.06.24 04:3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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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드라마가 그리는 장애인 삶의 한계
히트작·글로벌 대작도 "고리타분·퇴행"
①장애를 불행·비극과 동일시하고
②주인공 선함 부각하는 도구로 사용
③장애인 배우 보기 드물고
④시대 뒤처진 장애인 보조기구들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에서 '임솔'은 하반신 마비가 된 후 삶의 의욕을 잃는다. tvN 캡처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에서 '임솔'은 하반신 마비가 된 후 삶의 의욕을 잃는다. tvN 캡처

#. “세상에는요, 날이 너무 좋아서 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어요.” 상반기 최고 화제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의 주인공 ‘임솔’(김혜윤)은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됐다. 날씨가 좋아도 나들이가 쉽지 않은 지체 장애인의 삶을 비관하며 그가 한 말이다. 이야기 전개를 위한 장치라지만 이런 접근은 괜찮을까. 차미경 문화 칼럼니스트는 "고리타분한 방식"이라며 "'장애인이 됐으니 너무 불행하고 죽고 싶은 게 당연하다'는 식으로, 과도하게 비극적으로만 그렸다"고 지적했다.

#. 넷플릭스 상반기 최대 기대작으로 관심을 받았던 드라마 '더 에이트 쇼'에도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 '노상국'(배성우)이 나온다. 빈곤과 불운의 상징으로 비극적 최후를 맞는 캐릭터다. 이 드라마가 장애를 다룬 방식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김헌식 중원대 사회문화대 교수는 "장애를 잘못 다루는 방식 중 하나가 극적 감동을 위해 장애인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과거엔 많았지만 요즘엔 거의 없다"며 "'더 에이트 쇼'가 이런 퇴행적 재현을 해서 깜짝 놀랐다"고 꼬집었다.

드라마 '더 에이트 쇼'에서 지체 장애인인 '노상국'은 빈곤과 불운의 상징으로 그려진다. 넷플릭스 캡처

드라마 '더 에이트 쇼'에서 지체 장애인인 '노상국'은 빈곤과 불운의 상징으로 그려진다. 넷플릭스 캡처

요즘엔 장애인이 한 명도 나오지 않는 드라마를 찾기 힘들 정도로 장애가 드라마에 깊숙이 들어왔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주인공이 나온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2022) 이후 가속화된 변화다. 청각 장애인 남자 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2023)와 청각 장애인 부모를 둔 청인 자녀인 '코다'를 주인공으로 한 청춘 드라마 '반짝이는 워터멜론'(2023) 등이 대표적. 하지만 정작 드라마 속 장애인의 이미지는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평가가 많다. 지체 장애인이기도 한 차미경 칼럼니스트, 대구대 장애학과 대학원 강사이기도 한 김헌식 교수와 함께 이런 시선을 짚어봤다.

불행·비극 대신 "장애 자부심"

드라마가 장애를 다룰 때 쓰는 가장 흔한 공식은 장애를 불행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지난해 청춘 로맨스 드라마임에도 코다를 다뤄 화제가 됐던 '반짝이는 워터멜론'도 그랬다. 과거로 타임슬립한 주인공은 교통사고로 청력을 잃은 아버지의 장애를 막기 위해 애쓴다. 차미경 칼럼니스트는 "장애를 반드시 막아야 하는 불운, 불행으로 보는 사회의 시선을 그대로 따랐다"며 "청각 장애인인 주인공 어머니 역시 학대와 폭력을 수동적으로 감내하는 것으로만 그려지는데, 드라마가 기존의 편견을 고수하면 대중의 편견은 더욱 강화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오히려 어머니의 '장애 자부심'을 보여줬다면 장애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애 자부심은 장애를 결함이 아닌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반짝이는 워터멜론'의 주인공 '하은결'은 과거로 돌아가 아버지의 청각 장애를 유발한 사고를 막기 위해 분투한다. tvN 캡처

'반짝이는 워터멜론'의 주인공 '하은결'은 과거로 돌아가 아버지의 청각 장애를 유발한 사고를 막기 위해 분투한다. tvN 캡처

장애인에게 목소리를 주지 않는 것 역시 한계로 꼽힌다. 예컨대 편견을 가진 극 중 인물 때문에 장애인이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했을 때 잘못을 꾸짖는 것은 장애인 본인이 아닌 정의감에 불타는 주인공인 경우가 많다. 주인공의 선함을 강조하기 위해 장애가 도구화되는 것이다. 장애인이 선인 혹은 악인으로 이분법적으로만 묘사되는 것 역시 오랜 관행이다. 김헌식 교수는 "넷플릭스 드라마 '살인자ㅇ난감'의 패륜 범죄자가 시각 장애인인데 '원래 나쁜 사람'으로만 그려졌다"며 "왜 저런 행동을 했는지 인과 관계를 보여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두 전문가는 최근 드라마 중 '사랑한다 말해줘'를 호평했다. "수어를 또 다른 언어로 인식하게 만들었고"(차미경 칼럼니스트), "극 설정과 인물 동선 등에서 장애에 대한 깊은 고민이 드러났다"(김헌식 교수)고 평했다.

남자 주인공 '차진우'가 청각 장애인인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 전문가들은 이 드라마를 장애인을 편견 없이 다룬 작품으로 꼽았다. 스튜디오지니, 스튜디오앤뉴 제공

남자 주인공 '차진우'가 청각 장애인인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 전문가들은 이 드라마를 장애인을 편견 없이 다룬 작품으로 꼽았다. 스튜디오지니, 스튜디오앤뉴 제공


'휠체어 PPL'이 필요한 이유

이들은 장애인이 나오는 드라마에 없는 것 두 가지도 지적했다. ①장애인 배우와 ②현실에 맞는 장애보조기구다. 장애인이 연기할 수 있는 장애 배역도 대부분 비장애인들이 연기해 TV에서 장애인 배우를 보기가 쉽지 않다. 반면 연극계에서는 '틴에이지 딕'에서 주인공을 맡은 뇌병변 장애인 배우 하지성이 지난해 백상예술대상에서 연극 부문 연기상을 받아 큰 울림을 줬다.

연극배우 하지성이 지난해 4월 인천 파라다이스시티에서 열린 ‘제59회 백상예술대상’ 레드카펫 행사에 참석했다. 뉴스1

연극배우 하지성이 지난해 4월 인천 파라다이스시티에서 열린 ‘제59회 백상예술대상’ 레드카펫 행사에 참석했다. 뉴스1


'우리들의 블루스'(2022)는 주인공 '이영옥'(한지민)의 동생을 다운증후군 화가인 정은혜씨가 연기해 화제가 됐다. 드라마에서 장애 당사자가 장애인 연기를 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tvN 제공

'우리들의 블루스'(2022)는 주인공 '이영옥'(한지민)의 동생을 다운증후군 화가인 정은혜씨가 연기해 화제가 됐다. 드라마에서 장애 당사자가 장애인 연기를 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tvN 제공

시대에 뒤처진 장애보조기구 등 디테일의 실패도 흔하다. 극 중 재벌 회장이 현실에선 아무도 타지 않는 구형 휠체어를 타거나,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 사는 집인데 현관에 경사로가 없다. 김헌식 교수는 "복지 정책이 나날이 변화하고 장애인을 위한 웨어러블 기기 등이 진화하고 있는데 제작진은 관련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특히 첨단 장애보조기구의 등장은 선순환의 고리가 된다. 차미경 칼럼니스트는 "만약 휠체어 등 첨단 기기가 PPL(간접광고)로 드라마에 나오면 정보격차가 큰 장애인에게는 좋은 정보가 되고, 비장애인에게는 장애인의 삶이 비관적이지만은 않다는 걸 보여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렇게 강조했다. "장애인이 불행하리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은 일상에서 장애인을 만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에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자연스럽게 일상을 나누는 장면이 드라마에 많이 나오면 '행복'과 '불행'을 따로 말하지 않아도 대중 인식이 달라져요. 그래서 대중매체가 장애를 잘 그려야 합니다.”

차미경(왼쪽 사진) 문화 칼럼니스트와 김헌식 중원대 사회문화대 교수. 본인 제공

차미경(왼쪽 사진) 문화 칼럼니스트와 김헌식 중원대 사회문화대 교수. 본인 제공


남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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