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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따리 갖다 놓은 집이 주인이다

입력
2024.04.22 04: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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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편집자주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면 신발 끈을 묶는 아침. 바쁨과 경쟁으로 다급해지는 마음을 성인들과 선현들의 따뜻하고 심오한 깨달음으로 달래본다.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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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가면 중생사라는 절이 있다. 신라시대 이 절에는 신통력 무진한 관음보살상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어쩌다 이 보살상이 생겼는지 그 사연이 삼국유사에 나온다. 이야기는 중국으로 건너가 시작한다.

당나라 천자에게 대단히 예뻐하는 여자가 있었다. 아름다움이 절로 흘러 누구와 견주기 어려울 정도였다. 천자는 여자의 초상화를 그려 남기도록 했는데, 화가가 명령을 받들어 그림을 그리다 마지막에 붓을 잘못 떨어뜨려 배꼽 아래 붉은 자국이 생겼다. 제아무리 지우려 해도 고쳐지지 않자, 분명코 날 때 생겼으리라 생각하고 그냥 바쳤다. 그런데 그것이 사단이었다. 여자에게는 진짜 배꼽 아래 점이 있었던 것이다. '안에서만 아는 비밀'을 어찌 그렸느냐며 천자는 노발대발했다.

옥에 갇힌 화가를 두고 주변 신하가 나섰다. 평소 바르고 곧은 성품으로 보아 결코 허튼짓을 했을 리 없다 하자, 천자는 짐짓 너그러운 척 용서의 대가로 '지난밤 내 꿈'을 그려내라 했다. 이것은 죽으라는 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화가는 만사 포기한 듯, 저승길 공덕이라도 쌓자는 심정으로 관음보살상을 그려서 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그림은 천자의 꿈과 똑같았다.

화가는 어떻게 됐을까. 다행히 의심이 풀린 천자로부터 용서는 받았다. 그러나 살아났다고 산 것이 아니었을 터, 만정이 떨어진 화가는 제 나라를 떠나기로 작심했다. 배를 타고 바다 건너 이른 곳이 신라의 경주, 바로 중생사에 이르러 보살상 하나를 그려 걸었던 것이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높이 우러러보며 기도하여 복을 받은 것이 이루 적기 어렵다'고,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스님의 붓길은 감격에 넘쳐 신나게 너울거린다.

여기까지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하다. 구체적인 보살상의 신통력은 본문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화가가 자기 나라를 버리고 떠나는 그 대목이 새삼스럽다. '지난밤 내 꿈'을 그리라는 권력자의 억지 앞에 무너지고, 구사일생 뒤에 찾아오는 무력감을 이기지 못해 떠난 아픈 장면 말이다. 역사를 가만 떠올려보면 이런 장면이 저때뿐만 아닌 듯하다.

우리 속담에 '보따리 갖다 놓은 집이 주인'이라는 말이 있다. 제 보따리를 가져다 풀어 둔 곳이 바로 주인 되는 집이라는 뜻이다. 떠나지 않고 돌아오고, 몸만 아니라 마음이 머물러야 제집이다. 오늘 우리는 보따리 풀어놓고 마음 붙일 집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가.


고운기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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